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사의 난 (문단 편집) == 그 외 == 이 시기에는 바로 전 '[[개원의 치]]' 시대까지 이름을 날리던 문필가들 또한 살아있을 때라, 당의 문학 작품을 공부하면 이 시기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. 미(美)이론이 크게 바뀌었고, 이때를 기점으로 예술 창조의 원동력에 대한 인식이 유가와 굴원에 바탕을 둔 희로애락의 발동, 발분(發憤), 동태(動態)에서 불교와 도가를 바탕으로 한 정(靜), 허정(虛靜), 무아지경으로 바뀌게 되었다. [[두보]]는 장안이 점령되고 고향에 갈 수 없자 그리운 심정을 노래한 <춘망>을 지었다. 또 그의 시 <강남봉이구년>에서 당의 중흥기와 기왕 이범이 이구년을 매일같이 불러 놀던 시절, 그리고 안사의 난으로 망가진 나라와 늙어버린 두보 / 이구년이 만난 시절이 일치함을 생각하면 세월무상을 느낄 수 있다. 이외에도 두보의 중장년(56세에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말년이다) 시절 작품의 거의 다수에 안사의 난속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는데, 심지어 두보의 막내자식도 이 시기에 굶어죽었고, 그 슬픔이 시에 절절히 나타나 있다. [[이태백]]의 경우, 안사의 난 사이에 일어났던 영왕 이린의 난에 가담했다가 귀양가서 죽을 뻔했지만 곽자의의 요청으로 간신히 용서받은 바 있으며, [[왕유(당나라)|왕유]]는 이때 장안에 머무르다 안녹산의 반란군에 붙들려 낙양으로 끌려가 협박에 못 이겨 안녹산의 치하에서 관직을 맡았고, 이 일이 문제가 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가 동생의 도움으로 살아났는데, 이때의 경험을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환멸을 처절하게 느끼고, 불교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. [[한유]]의 작품 또한 이 혼란기를 그린 사례가 존재한다. 한편 이 시대 사람은 아니지만 [[백거이]]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피란을 <장한가>로 노래했다. 지방 세력을 끌어들인 국가 중앙 세력의 반란,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으로 비롯된 1세기 뒤쯤의 군벌 난립 등은 같은 시대를 보내던 [[신라]]와 무섭도록 일치한다. 반면 [[발해]]의 경우, 이 시기 [[문왕(발해)|문왕 대흠무]]의 통치 아래 전성기를 맞고 있었으나, 상경과 동경으로의 천도가 안사의 난으로 인한 혼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 또한 존재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